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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라의 작업에 관하여(2017)

글_박예은(작가)









박소라는 대중매체에서 사용하는 프로파간다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문화적인 권력관계에서 고착화된 이미지를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작가는 주로 인터넷, 유투브, 텔레비전 등의 디지털 플랫폼 기반의 미디어로 만들어진 보는것 — 보여지는 것 의 수직적인 관계를 상기시키는 소재를 주로 사용한다.

박소라의 2015년도 작업 <This is how Americans live today (2015)>는 작가가 탈북자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작가는 이 경험을 통해 ‘북한’과 ‘북한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느낀듯하다. 작가는 기존에 가졌던 ‘북한의 집단화된 이미지’와 자신이 가르쳤던 탈북자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고 언급 하기도 했다. 즉 집단의 이미지와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포착한 것인데, 이 과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한 집단에 대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역할을 하는 미디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This is how Americans live today (2015)>는 북한의 프로파간다 선전영상의 대본이 천에 디지털 자수로 수놓아져 있는 작품이다. 글의 내용은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해 미국의 빈곤층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북한의 체제를 선전하는 이 영상은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있지만 정작 북한 사람들은 그들의 체제적 문제 때문에 이 영상에 접근하지 못한다. 미국의 빈곤함을 강조하며 북한의 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은 오히려 북한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공개적인 플랫폼에 드러나면서 역설적으로 북한 체제의 폐쇄적인 모습만이 강조될 뿐이다. 커다란 천에 자수로 수놓아져있는 북한 프로파간다 선전물은 비물질적인 디지털 플랫폼에서 빠져나와 실제로 시간과 무게가 느껴지는 물질로 다가오고, 이것은 미디어로 만들어진 관념이 현실에서 사람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는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미디어 속에서의 이미지 과잉현상 관심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2016년의 작업에서 작가는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정보 공간 속의 이미지의 특징과 그 미디어에서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법에 주목한다. <익명의 피해자들을 위한 기념비 (2016)>는 작가가 특정 기간 동안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들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미지의 선택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민간인을 대상으로 일어났으며 2. 의도와 주체가 불분명한 테러. 이 두가지 조건은 이미지 속의 절단된 신체가 ‘피해자’라는 지점을 극대화 시킨다. 작가는 이런 테러 사건 피해자의 신체가 담긴 이미지를 날짜별로 수집하고 크롭하여 다시 CD에 저장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비물질 데이터들이 물화되어 봉인된 것인데, 이 CD들은 유리 진열장에 넣어져 관객들이 만질 수 없고, 디지털 파일을 열어 볼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체를 볼 수 없는 상태로 전시되었다. <익명의 ‘개인’을 위한 추모회화(2016)>에서는 테러현장에서 훼손된 피해자의 시체가 담긴 사진 세 장을 유화 회화로 제작한 작품으로, 피해자의 신체가 있던 부분은 그림을 그리지 않은 채, 물감 대신 캔버스의 흰 천이 드러나게 완성된 작품이다.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 특히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 등의 작은 화면으로도 손 쉽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 준다. 디지털 파일은 이론상으로는 반복의 정수를 재현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데이터가 존재하는 한 하나의 기계에서 다른 기계로 끊임없이 복사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파일의 내용이나 프로토콜이 렌더링되는 기계의 특성에 의해 아주 작은 변화에도 손실이 일어나 육안으로 보기에는 똑같지만 전혀 다른 정보를 가지게 되어, 실제로는 같은 이미지가 아니게 된다. 이 상황은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편집되고 조작되면서 변주되는 상황을 가속화 시킨다. 고통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이런 고통 자체에 점점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수잔 손택은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타클로 소비해 버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는 이런 상황에 역행하는 듯이 희생자의 이미지를 하나 하나 찾아내 DVD 한 장이라는 물리적인 안식 공간을 만들어준다.

2017년도에는 작가는 미디어가 어떻게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탐구한다. <오뉴월서리 (2017)> 는 작가가 제작한 타자게임이다. 감상자는 한국의 일일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의 단어, 어절, 문장으로 나눠진 3단계의 타자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이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했을, 자판에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위치를 학습하기 위해 반복했던 타자 게임의 포맷과,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인 단어—어절—문장의 단계를 가진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가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하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와, 고부 갈등 등 가부장제 아래에서 마치 있을법한 여성상을 그려내는 한국의 일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 속의 단어, 어절, 문장이 게임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면 관객은 그것을 타이핑 하게 된다. 작품 제목의 모티프는 한국의 유명한 속담인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다. 속담은 한 집단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한 문화적 태도를 투영하여 구비전승 되어 집단의 내부인 끼리 공유하는 것이다. 즉, 그 집단의 내부자가 아니라면 공감 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한국 사회가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고착화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작품감상을 위해 감상자가 키보드를 문자를 치는 반복적인 제스쳐를 행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오랜시간동안 한국 사회에서 속담으로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상황을 상기시킨다. 또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단어를 완성해야 하는 감상자의 수행자적 역할은 티비 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여성상을 소비하여 같은 레퍼런스를 공유하는 공통체의 일원이 되는 무의식적 학습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제까지의 작품을 바탕으로, 작가가 수직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인 힘이나 실제적인 권력이 아닌 시선의 위치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힘의 관계를 응시로 해석하는 듯하다. 일반적인 시각성과는 다르게 응시는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보여지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This is how Americans live today(2015)>는 작가가 북한이라는 집단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탈북자를 가르치면서 깨지고, 미디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제작한 작품이다. 즉 단순히 미디어에서 생산된것을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본다. <익명의 피해자들을 위한 기념비(2016)>는 타인의 고통을 쉽게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 (미디어에 접근가능한 시스템과 행동)이 그들의 고통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무관심이 아니라 깨어있는 감각을 가질 것을 주장하는 것 같다. <오뉴월서리 (2017)>에서는 미디어가 고정관념을 고착화 시키는 방법론인 반복성을 사용하여 보여지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데, 이 지점에서는 전용을 통해 전복을 하려던 페미니즘의 기조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의식적인 수직관계에서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실마리를 어렴풋하게 작가의 가장 최근 작품인 <더 높이, 더 높이(2017)>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더 높이, 더 높이(2017)>는 사자머리를 한 학생들의 증명사진과 영상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증명사진의 소녀들은 모두 한껏 부풀린 머리를 하고있다. 실제 사자머리를 했던 학생들을 증명사진에 한국의 중고등 소녀들의 이목구비를 합성해 제작한 증명사진 같은 사진이다. 영상 역시 실제 사자머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여성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이지만 대상의 얼굴은 나오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음성만 나오게 된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거나, 얼굴이 나오지 않는 익명성에 기대어 존재한다. 헤어스타일은 신체의 일부분으로 자기를 보여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작가가 의무교육을 받던 시기에, 학교라는 집단 공동체는 ‘학생다운 단정함’을 이유로 ‘귀밑 3cm’와 같은 두발 제한을 학생들에게 수행할 것을 지시했다. 학생들은 이런 시스템 안에서 허점을 찾아 저항했는데, 머리의 길이가 아닌 볼륨을 살리는 스타일을 찾아내어 길이는 유지한 채 부피를 키우기 시작했다. 작가는 이것에 대해 ‘학생들이 단순히 순응을 하는게 아니라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는 점’ 에 포커스를 두었다고 했다. 단순히 순응하는게 아니라 학생들 자신이 규제와 플랫폼을 적절히 사용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의 미디어 수용자들이 단순히 미디어가 제공하는 것을 소비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콘텐츠 생산자로서 직접 참여하는 1인방송이나, 인스타그래머처럼 오히려 미디어를 능동적으로 역이용하는 동시대의 흐름을 생각나게 하는데 이런 지점을 과거의 학창시절의 두발규제 경험에서 찾아낸 것이 독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