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시 중인 작품입니다. 추후 더 많은 사진이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비평
사치품, 그 너머로서의 얼굴
(글: 엄제현)
(글: 엄제현)
살인적인 인플레와 가치저장수단의 비물질화로 인해 사장되어가다시피 하는 50원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주화에 그려진 벼 이삭을 보고 생각에 잠길 이는 어릴수록 드물리라 생각된다. 앞면에 새겨진 벼의 품종은 통일미다. 전후 베이비 붐이 시작되면서 미곡생산량은 상대적으로 절하되기 시작했고, 정부는 쌀의 품종개량에 전력을 기울였다. 환경에 취약한 농작물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위적인 품종개량의 역사를 거쳤고, 동아시아가 선호하는 자포니카 쌀 양산 문제는 마침내 허문회라는 인물에 의해 해결된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로 재임하던 그는 1964년, 쌀 문제를 두고 고심하던 농촌진흥청에 국제미작연구소(IRRI) 파견을 요청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조금 떨어진 남부 지역의 이 연구소에서 품종교배를 반복한 그의 노력은 ‘통일미’라는 결실을 맺는다. 비록 이후엔 맛과 더불어 냉해에 취약하다는 단점으로 인해 사장되었지만, 통일미는 전국적으로 재배되며 남한의 미곡수요를 만족시킨 성과를 인정받아 이미지로 탈각되어 영원을 보장받게 되었다.
통일미 품종 하나를 얻기 위해 수백 번의 교잡이 이루어졌음은 자명하다. 이런 인위선택은 자연선택의 범주나 역사에 비하면 지나치게 짧을뿐더러, 어떤 영역에선 인위선택과 자연선택을 면밀히 나누기도 어렵다. 자연 안에서 적자가 되려는 욕망은 상호삼투적이다. 늑대가 개가 되어 온 긴 역사적 과정에서 반영된 것은 오로지 인간의 욕망뿐일까? 개도, 인간도 스스로의 욕망을 각자에게 투사하고 그에 걸맞게 진화했다. 더 온순하게, 더 충직하게, 더 사랑스럽게 진화한 개들은 인간들의 울타리 안에서 번영이라는 종적 명령을 완수했다. 이는 200년에도 채 못 미치는 브리딩 문화의 시간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위선택이란 낱말에 내장된 개념은 인간과 자연을 왜곡된 방식으로 분리시키면서 욕망의 상호주의를 가린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은 자연 안에서 꽃과 벌처럼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상대방의 자리를 종적, 본능적, 의식적으로 상상하고 설계하는 프로그램을 실험한다. 꽃은 번식을, 벌은 꿀을 얻는다. 이 도식에서 과연 누가 욕망의 객체이며, 주체일까?
우리는 박소라의 작업에서도 비슷한 욕망의 관계도를 읽어낼 수 있다. 오늘날 새로움의 미학은 오직 상품에 있다는 듯, 제품시연회의 형식을 빌어 전개되는 <메타뷰티 이노베이션>에선 페이스 허거를 연상시키는 웨어러블 기기 ‘아이 메타’가 선전된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반영하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코스메틱 디바이스다. 영상 속의 박사라는 SF, 디지털, 미래시제 등의 장치들이 무색하게 오늘날의 이슈처럼 들리는 말들을 거듭 피칭한다. ‘아이 메타’는 “소셜미디어에서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받을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수익모델을 구축한 인플루언서들의 “노동생산성을 극대화 할 수 있”다. “진화를 넘어선다”는 박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는 여전히 환경-적응의 프레임 안에서 회전하는 욕망의 문제처럼 보인다. 주목경제와 맞닿은 가정 안에서 시작되는 기이한 게임. 각자가 꽃과 벌처럼 얻을 것을 얻고 내줄 것을 내준다. 시각적 충족을 얻고 광고를 소비하는 관객, 관심과 재화를 얻고 즐거움을 수출하는 인플루언서, 화폐를 지출하고 트래픽을 얻는 광고사, 세 곳 모두로부터 이익을 편취하는 플랫폼. 누구 하나 잃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신성한 도박판이 차려졌다.
이와 같은 경제를 작동시키는 ‘아이 메타’의 힘의 공식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유기체의 외모는 타인의 욕망 안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자발성에 의지한다. 하나의 외모가 아름답기 위해선 보여짐이라는 행위를 통해 발산되는 광채 그 이상을 보답 받아야만 한다. 아름다움은 눈, 코, 입의 조화에 기인한 내적 본질이 아니라 보여짐이라는 행위 속에 있으며, 시선을 통과해 반사되는 광채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커다란 매력으로 치환된다. 타인의 눈이라는 돋보기 속에서 광채가 집약되어야만 하기에, 타인의 눈은 누군가의 미를 투사할 옵스큐라가 된다. 그러니 외모는 본인이 소유한 불가분의 성물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시계열에 의해 등락하는 자산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 메타’는 시계열에 대해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안정된 외모로부터 탈구되고 포트폴리오 기법을 택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제 외모는 능동적이다. 저쪽의 일방적인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평가가 이루어질지 예측하고 대응하는 유능한 투자자로서의 외모.
이 과정에서 ‘아이 메타’는 숭고해진다. 그간 외모가 내리쬐는 광채란, 타인에게 먼저 베풀지만 존재론적 보답이 전제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 메타’의 궁극적 이타심은 광채의 수렴을 생물학적이고 유기체적인 것에서 품이 들지 않는 ‘좋아요’로 변형시키고 발산의 광채를 지표로 전환시켜 관람자 역시 광채의 일부가 되어 발산의 순례에 동참하도록 이끈다. 이제 보여지는 것에 자족성이나 고양감 따위는 없다. 이것은 오로지 무차별적 타인만을 겨냥한 섬광이라는 점에서 인공-태양이다. 이 무기체적-금속성 매력은 착용자를 피부 아래로 유폐시켜 귀금속과 같은 구간으로 재배치한다. 본디 귀금속의 광채는 착용자를 돋보이게 하지만, ‘아이 메타’의 광채는 메두사처럼 사용자를 광물로 석화시켜 광채-그-자체로 만든다. 낙하한 숭고함 위로 시시각각 반영되는 트렌드는 구체적인 상을 맺지 못한 채 (마치 그 안에 갇힌 얼굴이 뛰쳐나오려 발악이라도 하는 듯)무한히 유동한다. 트렌드를 자임하려는 모든 트렌드가 실시간으로 경합 중일 것이기에.
이제 얼굴에서 일관성을 찾아보고 주체의 본질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좌절될 것이다. 통일벼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안정감은 동일성의 복사와 일관성을 유지하는 가치의 지표로 인해 보장되었다.(50원은 언제나 50원이다) 그렇지만 이 안정감은 언제나 허구적이었다. 화폐의 안정성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끊임없이 감쇠할 뿐이라는 경제를 은폐한 뒤에야 등록될 수 있는 품종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외모가 주는 존재의 동일성은 노화와 타인의 평가라는 요인에 의해 허구적이었으면서도, 이 실재를 간과한 채 보증받았다. ‘아이 메타’는 차라리 솔직하다. 얼굴의 체계 역시 자산과 같은 평가 체계 안에 속한다는 것을 갈파하며 끊임없이 적응하기를 요청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 믿었던 외모는 단순히 눈, 코, 입의 기능적 차원에서만 유효했으며, 그것들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장식적 이미지로서의 외모는 정반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직격하는 디바이스. 이제 불변이나 본질은 드러난 허구가 되었다. 그동안 특정한 양식이나 트렌드와 단절될 수 있는 것은 유일무이성이었다. 그것은 아우라의 원천이었으며, 예술이 공예에 대립되어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소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문과도 같았던 얼굴의 고유함이 담보하던 존재론적 안락함은 ‘아이 메타’의 문화적 우세 속에서 부식된다. 눈, 코, 입의 사사로운 배치를 통해 빚어낸 고유성의 표찰은 구시대의 유물로 화한다. 눈, 코, 입은 ‘붙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장식이다. 지당하게도, 장식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 얼굴이라는 오래된 기종의 촌스러움은 5백 명만 소유할 수 있다는 ‘아이 메타’의 희소성에 의해 배가된다. 이제 종합은 눈, 코, 입에 의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한때는 그것의 상보성으로 인해 나타는 표정을 바탕으로 영혼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시대가 변해버린다. 소유와 존재가 분리된 자본주의적 소외는, ‘아이 메타’의 소유가 존재를 구성하는 종합 속에서 환등상적 헤테로토피아를 구성한다. 광채-그-자체를 표상하는 메탈릭한 유동의 외형에는 희소성이 첨가되어 사회적 힘과 지위를 시각적으로 표시하기에, 광배는 후광에서 옮겨가 전면에서부터 방사되는 역사적 상변이를 일으킨다.
‘아이 메타’는 시각적으로, 장식적으로, 기능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징후적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의 미래는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데 달려 있다”는 박사라의 말은 ‘아이 메타’를 생존을 위한 키트처럼 여겨지게끔 한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 메타’는 단순히 인플루언서를 위한 사치재가 아니라, 기필코 가져야만 하는 필수재가 되어버린다. 변화에 대한 적응은 가속하는 세계에서 누락되지 않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자연 안의 만물이 발생 이래로 지속적으로 다투어 온 전장이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반영하는 것을 ‘자동화’한다는 점에서 이제 변화와 적응은 주체적 역능이 아니라 성능에 따른 모방의 문제가 된다. 이 모방은 유행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유행을 모방하는 속도는 곧 그가 속한 계급의 지표이기도 했다. 그것이 계급을 드러내기에, ‘지나간다’는 수사가 만들어내는 앞-뒤의 착각에서 벗어나 유행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 유행에 동참할 때 인간은 특정한 양식 안에 속하면서 특정 구간에 입장하는 동시에, 하위 구간으로부터 차별된다. 그러니 ‘아이 메타’는 우리에게 도태와 모방의 양자택일을 종용한다. 나락까지 침하하거나, 방공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거나.
이제 우리는 통일벼와 대척점에 서있는 ‘아이 메타’의 성상을 유비할 수 있게 되었다. 통일벼는 비록 영원을 획득했지만, 가속하는 인플레이션과 세계의 비물질화라는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도태되었다. 가치 하락에 의해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결제수단의 다각화로 인해 더욱 그렇게 되었다. 반면 ‘아이 메타’는 어떠한 형체도 이룰 수 없기에 무엇도 보장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꾸로 이 흐름 바깥으로 튕겨나가지 않을 것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를 말할 것도 없이, 이 유동성은 곧 자본의 유동성이고, 우리 삶의 유동성과 맞닿는다. 유동성에 쓸려나갈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하고 그 안으로 은닉할 수 있도록 돕는 ‘아이 메타’의 외피는 어쩌면 우리 인류에게 새로이 돋아난 뿔일지도 모른다. 물론 새로이 뿔이 자라났기에, 우리는 더 이상 인간으로 분류될 수 없을 것이다.
통일미 품종 하나를 얻기 위해 수백 번의 교잡이 이루어졌음은 자명하다. 이런 인위선택은 자연선택의 범주나 역사에 비하면 지나치게 짧을뿐더러, 어떤 영역에선 인위선택과 자연선택을 면밀히 나누기도 어렵다. 자연 안에서 적자가 되려는 욕망은 상호삼투적이다. 늑대가 개가 되어 온 긴 역사적 과정에서 반영된 것은 오로지 인간의 욕망뿐일까? 개도, 인간도 스스로의 욕망을 각자에게 투사하고 그에 걸맞게 진화했다. 더 온순하게, 더 충직하게, 더 사랑스럽게 진화한 개들은 인간들의 울타리 안에서 번영이라는 종적 명령을 완수했다. 이는 200년에도 채 못 미치는 브리딩 문화의 시간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위선택이란 낱말에 내장된 개념은 인간과 자연을 왜곡된 방식으로 분리시키면서 욕망의 상호주의를 가린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은 자연 안에서 꽃과 벌처럼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상대방의 자리를 종적, 본능적, 의식적으로 상상하고 설계하는 프로그램을 실험한다. 꽃은 번식을, 벌은 꿀을 얻는다. 이 도식에서 과연 누가 욕망의 객체이며, 주체일까?
우리는 박소라의 작업에서도 비슷한 욕망의 관계도를 읽어낼 수 있다. 오늘날 새로움의 미학은 오직 상품에 있다는 듯, 제품시연회의 형식을 빌어 전개되는 <메타뷰티 이노베이션>에선 페이스 허거를 연상시키는 웨어러블 기기 ‘아이 메타’가 선전된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반영하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코스메틱 디바이스다. 영상 속의 박사라는 SF, 디지털, 미래시제 등의 장치들이 무색하게 오늘날의 이슈처럼 들리는 말들을 거듭 피칭한다. ‘아이 메타’는 “소셜미디어에서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받을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수익모델을 구축한 인플루언서들의 “노동생산성을 극대화 할 수 있”다. “진화를 넘어선다”는 박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는 여전히 환경-적응의 프레임 안에서 회전하는 욕망의 문제처럼 보인다. 주목경제와 맞닿은 가정 안에서 시작되는 기이한 게임. 각자가 꽃과 벌처럼 얻을 것을 얻고 내줄 것을 내준다. 시각적 충족을 얻고 광고를 소비하는 관객, 관심과 재화를 얻고 즐거움을 수출하는 인플루언서, 화폐를 지출하고 트래픽을 얻는 광고사, 세 곳 모두로부터 이익을 편취하는 플랫폼. 누구 하나 잃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신성한 도박판이 차려졌다.
이와 같은 경제를 작동시키는 ‘아이 메타’의 힘의 공식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유기체의 외모는 타인의 욕망 안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자발성에 의지한다. 하나의 외모가 아름답기 위해선 보여짐이라는 행위를 통해 발산되는 광채 그 이상을 보답 받아야만 한다. 아름다움은 눈, 코, 입의 조화에 기인한 내적 본질이 아니라 보여짐이라는 행위 속에 있으며, 시선을 통과해 반사되는 광채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커다란 매력으로 치환된다. 타인의 눈이라는 돋보기 속에서 광채가 집약되어야만 하기에, 타인의 눈은 누군가의 미를 투사할 옵스큐라가 된다. 그러니 외모는 본인이 소유한 불가분의 성물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시계열에 의해 등락하는 자산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 메타’는 시계열에 대해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안정된 외모로부터 탈구되고 포트폴리오 기법을 택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제 외모는 능동적이다. 저쪽의 일방적인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평가가 이루어질지 예측하고 대응하는 유능한 투자자로서의 외모.
이 과정에서 ‘아이 메타’는 숭고해진다. 그간 외모가 내리쬐는 광채란, 타인에게 먼저 베풀지만 존재론적 보답이 전제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 메타’의 궁극적 이타심은 광채의 수렴을 생물학적이고 유기체적인 것에서 품이 들지 않는 ‘좋아요’로 변형시키고 발산의 광채를 지표로 전환시켜 관람자 역시 광채의 일부가 되어 발산의 순례에 동참하도록 이끈다. 이제 보여지는 것에 자족성이나 고양감 따위는 없다. 이것은 오로지 무차별적 타인만을 겨냥한 섬광이라는 점에서 인공-태양이다. 이 무기체적-금속성 매력은 착용자를 피부 아래로 유폐시켜 귀금속과 같은 구간으로 재배치한다. 본디 귀금속의 광채는 착용자를 돋보이게 하지만, ‘아이 메타’의 광채는 메두사처럼 사용자를 광물로 석화시켜 광채-그-자체로 만든다. 낙하한 숭고함 위로 시시각각 반영되는 트렌드는 구체적인 상을 맺지 못한 채 (마치 그 안에 갇힌 얼굴이 뛰쳐나오려 발악이라도 하는 듯)무한히 유동한다. 트렌드를 자임하려는 모든 트렌드가 실시간으로 경합 중일 것이기에.
이제 얼굴에서 일관성을 찾아보고 주체의 본질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좌절될 것이다. 통일벼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안정감은 동일성의 복사와 일관성을 유지하는 가치의 지표로 인해 보장되었다.(50원은 언제나 50원이다) 그렇지만 이 안정감은 언제나 허구적이었다. 화폐의 안정성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끊임없이 감쇠할 뿐이라는 경제를 은폐한 뒤에야 등록될 수 있는 품종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외모가 주는 존재의 동일성은 노화와 타인의 평가라는 요인에 의해 허구적이었으면서도, 이 실재를 간과한 채 보증받았다. ‘아이 메타’는 차라리 솔직하다. 얼굴의 체계 역시 자산과 같은 평가 체계 안에 속한다는 것을 갈파하며 끊임없이 적응하기를 요청한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 믿었던 외모는 단순히 눈, 코, 입의 기능적 차원에서만 유효했으며, 그것들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장식적 이미지로서의 외모는 정반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직격하는 디바이스. 이제 불변이나 본질은 드러난 허구가 되었다. 그동안 특정한 양식이나 트렌드와 단절될 수 있는 것은 유일무이성이었다. 그것은 아우라의 원천이었으며, 예술이 공예에 대립되어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소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문과도 같았던 얼굴의 고유함이 담보하던 존재론적 안락함은 ‘아이 메타’의 문화적 우세 속에서 부식된다. 눈, 코, 입의 사사로운 배치를 통해 빚어낸 고유성의 표찰은 구시대의 유물로 화한다. 눈, 코, 입은 ‘붙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장식이다. 지당하게도, 장식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 얼굴이라는 오래된 기종의 촌스러움은 5백 명만 소유할 수 있다는 ‘아이 메타’의 희소성에 의해 배가된다. 이제 종합은 눈, 코, 입에 의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한때는 그것의 상보성으로 인해 나타는 표정을 바탕으로 영혼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시대가 변해버린다. 소유와 존재가 분리된 자본주의적 소외는, ‘아이 메타’의 소유가 존재를 구성하는 종합 속에서 환등상적 헤테로토피아를 구성한다. 광채-그-자체를 표상하는 메탈릭한 유동의 외형에는 희소성이 첨가되어 사회적 힘과 지위를 시각적으로 표시하기에, 광배는 후광에서 옮겨가 전면에서부터 방사되는 역사적 상변이를 일으킨다.
‘아이 메타’는 시각적으로, 장식적으로, 기능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징후적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의 미래는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데 달려 있다”는 박사라의 말은 ‘아이 메타’를 생존을 위한 키트처럼 여겨지게끔 한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 메타’는 단순히 인플루언서를 위한 사치재가 아니라, 기필코 가져야만 하는 필수재가 되어버린다. 변화에 대한 적응은 가속하는 세계에서 누락되지 않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자연 안의 만물이 발생 이래로 지속적으로 다투어 온 전장이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반영하는 것을 ‘자동화’한다는 점에서 이제 변화와 적응은 주체적 역능이 아니라 성능에 따른 모방의 문제가 된다. 이 모방은 유행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유행을 모방하는 속도는 곧 그가 속한 계급의 지표이기도 했다. 그것이 계급을 드러내기에, ‘지나간다’는 수사가 만들어내는 앞-뒤의 착각에서 벗어나 유행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 유행에 동참할 때 인간은 특정한 양식 안에 속하면서 특정 구간에 입장하는 동시에, 하위 구간으로부터 차별된다. 그러니 ‘아이 메타’는 우리에게 도태와 모방의 양자택일을 종용한다. 나락까지 침하하거나, 방공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거나.
이제 우리는 통일벼와 대척점에 서있는 ‘아이 메타’의 성상을 유비할 수 있게 되었다. 통일벼는 비록 영원을 획득했지만, 가속하는 인플레이션과 세계의 비물질화라는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도태되었다. 가치 하락에 의해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결제수단의 다각화로 인해 더욱 그렇게 되었다. 반면 ‘아이 메타’는 어떠한 형체도 이룰 수 없기에 무엇도 보장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꾸로 이 흐름 바깥으로 튕겨나가지 않을 것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를 말할 것도 없이, 이 유동성은 곧 자본의 유동성이고, 우리 삶의 유동성과 맞닿는다. 유동성에 쓸려나갈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하고 그 안으로 은닉할 수 있도록 돕는 ‘아이 메타’의 외피는 어쩌면 우리 인류에게 새로이 돋아난 뿔일지도 모른다. 물론 새로이 뿔이 자라났기에, 우리는 더 이상 인간으로 분류될 수 없을 것이다.